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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템플스테이 ; 천년고찰 신륵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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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 템플스테이 ; 천년고찰 신륵사

kim.pro 2011. 6. 11. 17:48




'6월 4일은 템플스테이 하는 날' 날짜부터 정하고 마땅한 절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후보 1번이었던 강화 전등사를 놓고 며칠간 고민을 거듭했지만 여주 신륵사로의 결정은 속전속결이었다. 그렇다. 운명적인 것은 그다지 고민의 여지가 필요없는 것이다.










운명에 이끌려 선택한 신륵사. 마음만 열렸을 뿐 지식과 정보에는 어두웠던지라 다녀와서까지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임을 고백한다. 정성으로 신륵사를 둘러보며 무식하지만 나름의 방법으로 공부하고 있는거라 믿었건만, 포스팅을 위해 서치하다보니 부족함이 끝도 없다. 아니, 욕심만큼 알기 위해선 불자가 되어야하나.











신륵사는 나옹화상께서 입적하신 사찰이다. 시절인연으로 닿아 만난 지산님은 나같은 문외한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셨다. "나옹화상은 원효대사보다도 유명하신 분"이라고.

- 화상(和尙) : 불교 교단의 스승을 일컫는 말
- 입적(入寂) : 승려가 죽음















靑山兮要 我以 無語 (청산혜요 아이 무어) /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 要我以 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 而無憎兮 (료무애 이무증혜) /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 如風 而終我 (여수 여풍 이종아)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 我以 無語 (청산혜요 아이 무어) /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 我以 無垢 (창공혜요 아이 무구) /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 而無 惜兮 (료무노 이무 석혜) /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 如風 而終我 (여수 여풍 이종아)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위의 시 구절을 남긴 분이 바로 나옹화상. 인도의 승려 지공법사의 제자이며 태조 이성계

의 왕사인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바로 이 3대 화상 지공, 나옹, 무학의 영정을 모셔놓은 조사당 [여주 신륵사 조사당 ; 祖師堂, 보물 제180호, 조선전기]은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라고 한다. 중앙의 나옹의 상과 영정, 좌우 지공과 무학의 영정이 걸려 있다.


문화재 감상하듯 들여다보다가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신을 벗고 조사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천년고찰의 고요

한 아침. 그때는 내 앞의 영정이 누구의 모습인지, 그 전각이 어떤 곳인줄도 몰랐음에도 무겁고 장엄한 느낌이었다.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조사당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키 큰 소나무 사이로 이어진다.












천년고찰의 클라이막스가 아닐까 싶을만큼 언뜻 보기에도 오랜 문화재 같은 돌. 무엇인고 하니 바로 나옹화상의 사리가 모셔진 보제존자석종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보물 제228호, 고려말기]이었다. 클라이막스가 맞구나- 아무리 종교에 문외한이어도 큰 스님의 사리가 모셔진 곳이라고 하니 우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오른쪽에는 나옹화상의 탑비인 보제존자석종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 보물 제229호, 고려말기]가 세워져있고, 석종 앞에는 석등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앞 石燈, 보물 제231호, 고려말기]이 부도를 밝히기 위해 세워져있다.

고려 공민왕과 우왕의 왕사였던 나옹화상은 어릴 적 이름이 원혜(元慧)이고 법명이 혜근(慧勤)이었단다. 신륵사를 돌아다니며 어떤 현판에 내 이름과 같은 慧자가 쓰여있어 반가운 마음에 아이폰으로 찍어두었는데, 나옹화상의 慧와 같이 쓰이니 느낌이 더 남다르다.










현재는 해체되어 보수공사에 들어갈 준비중인 극락보전 [신륵사 극락보전 ; 神勒寺極樂寶殿, 경기도 유형문화

재 제128호, 조선전기] 앞에 신륵사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다층석탑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 驪州 神勒寺 多層石塔, 보물 제 225호, 조선전기]이 세워져있다. 보통의 석탑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지는데 비해 특이하게도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초를 올리고 소원을 빌었다.














사찰 앞쪽 남한강변을 향하다가 비밀의 화원같은 계단을 올랐다. 해질녘의 빛을 받아 영롱해보이는 저 문화재는 무엇일까. 전각 안에 석비가 담겨 있었다. 대장각기비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 ; 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고려말기]라고 한다.

'고려말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라며 얼른 알아들을 수는 없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는데,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했다는 내용만이 마음에 들어왔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깨어지고 바랬지만 깍두기 공책처럼 칸을 내어 새긴 모양이 왠지 귀여웠다.


대장각기비에서 강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다층전탑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 驪州 神勒寺 多層塼塔, 보물 제226호, 고려전기]이 있는데 미처 사진으로 담지 못했다. 남한강을 바라보며 세워져있는 전탑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려시대 전탑이라고 한다.














신륵사로 결정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남한강가의 정자 강월헌(江月軒).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의 다비 장소였던 곳에 문도들이 정자를 세우고 혜근 나옹화상의 당호 '강월헌'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다. 옛 건물은 홍수로 인해 떠내려가고 1974년 새로 지은 것이라고. 드라마 추노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단다. 동쪽 방향으로 앉아 흘러내려오는 강물을 바라보는게 좋다.










강월헌 앞에는 자그마한 삼층 석탑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 ; 驪州神勒寺三層石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고려말기]이 자리하고 있다. 이 또한 나옹화상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다비 장소에 세워진 것이라고.










앞 마당의 은행나무마저도 이렇게 멋진 신륵사. (보호수로 지정된 660살 은행나무님)










이렇게 열심히 포스팅하고 있지만 사실 난 문화재에 큰 관심이 없는 한국인이다. 한옥, 기와 이런 한국적 색이 짙은 광경은 프레임에 담길 꺼려하고 (나 아닌 누가 담아도 멋지니까 다르게 담아낼 재간이 없다), 역사박물관 관람을 재미없어하고,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보다 자연이 만든 쪽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신륵사는 달랐다. 아마 사찰에 관심을 갖고 구석구석 둘러본게 처음이라 더 달랐을 것이다.










지금 신륵사는 앞으로는 4대강 사업이, 입구부터 템플스테이하는 문화원 쪽은 인도 조성공사가 한창이다. '속세 속의 사찰'이라는 말처럼 여느 사찰과 달리 속세의 끈과 가까이 닿아있어 낮에는 유원지의 음악소리가 들려오기까지 한다. 극락보전이 있는 사찰의 중앙부에 들어서야 비로소 속세와 분리된 느낌을 받는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두서넛 뿐인 '강가의 사찰'이지만 예의 아름다운 은빛모래와 퇴적층은 온데간데 없이 4대강 사업으로 인해 멋없이 유속 빠른 물이 흐를 뿐이다. 확실히 2011년 6월의 신륵사는 그야말로 과도기였다. 하지만 현대에 맞추어 어쩔 수 없이 변모해야하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도, 변모가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면 그 안에서 '조화'를 이루겠다는 의지와도 같은 것이, 신륵사에는 있다. 템플스테이 환경의 확장이 그것이며 여러가지 지역사업이 그것이다. 아마, 올해 말에 신륵사를 다시 찾는다면 그런 조화의 성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멋지게 보수된 극락보전도 만나고 싶다.










마지막으로, 사찰과 관련하여 세간에 알려주고 싶은 정보 한 가지. 그리고 넋두리.

신륵사에는 2,200원의 입장료가 있다. '절에서 무슨 입장료를 받아'하며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불쾌까진 아니더라도 '큰 절에는 입장료를 내야하나보다' 쯤으로 여겼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사찰에서 받는 입장료는 '문화재 관람료'이다. 그러니 입장료가 아닌 '관람료'가 맞다. 문화재가 없는 사찰은 관람료를 받지 않는다.

사찰에 있는 문화재 관리는 정부에서 소홀하다고 한다. 실제로 포스팅을 하며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문화재를 검색하니 모두가 "관리자(관리단체) : 신륵사"라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의아했다. 보물로 지정되어있는 문화재를 왜 정부에서 관리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

그래, 관리는 우리 스님들이 한다고 치자. 나는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이 걱정이었다. 정치사회경제 관련된 이야기 하는 걸 싫어하는 무식한 젊은이지만 몇 자 적어본다.

신륵사를 몇 해전 찾았다던 보살님은 아름다운 은빛 모래와 퇴적층을 유유히 흘러 지나는 강변이 사라졌다며 슬퍼하셨다. 사찰을 찾은 가족들이 강변에서 물에 발을 담그며 놀기도 했단다. 지금은 그런 멋이라곤 하나없이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과 다를게 없다고 안타까워하셨다. 그 뿐이 아니다. 안 그래도 홍수피해를 입는 여주지역인데, 사찰 앞으로 엄청난 양의 강물이 흐르고 있으니 홍수라도 나면 사찰까지 위험에 휩싸이진 않을까 걱정이다. 강 바로 앞에 자리잡은 강월헌과 자그마한 삼층석탑쯤은 강물이 집어삼키고도 남겠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고려시대 전탑은 어떤가.

서울에서는 4대강 사업이 피부로 와닿지 않으니 뉴스를 보지 않으면 잘 모르는 젊은이가 많다. 하지만 지방에 여행을 다니다보면 외지인에게도 그것은 현실이 된다. 외지인은 그저 혀를 차고 안타까워하며 돌아오지만 그곳에 사는 분들은 어떨까. 그리고 한반도의 미래는?


후에 다시 찾을 신륵사는 현대와 조화되어 건강하게 건재하길. 당장은 이번 장마피해로부터 빗겨가길.
부처님의 은공이 함께하길.









June 2011 @ 神勒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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